목차
1화 | 2화 | 3화 | 4화 | 5화 |
6화 | 7화 | 8화 | 9화 | 10화 |
1화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화창한 날.
나는 방의 창문을 열고, 힘껏 기지개를 켰다.
현자
음─! 바람 기분 좋다─!
(오늘은 임무도 없어서 푹 자버렸네. 어라……?)
열린 창문 너머로 작은 하얀 새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날아온다.
짹짹하고 귀엽게 지저귀며, 스윽 우아하게 창가에 내려앉았다.
???
안녕하세요, 현자님.
잠에서 깨셨나요?
현자
어! 그 목소리는, 라스티카인가요?
???
네. 맞습니다.
라스티카
제 목소리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반짝반짝 흩날리는 마법의 빛을 휘감고 나타난 라스티카가 우아하게 인사해온다.
현자
(마치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라스티카. 어……, 어째서 작은 새로 변신해 계셨던 건가요?
라스티카
안뜰에서 당신의 모습이 보이기에 초대하러 왔답니다.
현자님. 변화 마법의 스페셜 레슨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라스티카에게 이끌려 사쿠쨩과 함께 안뜰로 향하니 이미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미틸
앗, 현자님이다.
안녕하세요.
카인
좋은 아침, 아키라.
하이파이브!
샤일록
사랑스러운 학생이 또 한 명 늘었네요.
파우스트
그래, 현자에게도 좋은 공부가 되겠지.
현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변화 마법의 특별 수업을 하고 계시다고 라스티카에게 들었습니다.
미틸
맞아요! 처음에는 저랑 카인씨 둘이서 자율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스노우
우연히 지나가던 이들로 학생과 선생이 늘어 이리 북적이게 되었단다.
네로
나는 뭐, 간식 담당 같은 느낌이지만.
현자씨도 배고프면, 저기 바구니 안의 내용물 먹어도 돼.
현자
와,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
감사합니다, 네로. 나중에 천천히 먹을게요.
……어라. 루틸만은 노트를 가지고 계시네요. 뭔가 적고 계신가요?
루틸
네, 저는 기록 담당이에요.
실기 수업 때는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집중하고 싶겠죠?
그래서 오늘은 제가, 미틸과 카인씨가 받은 어드바이스를 대신해서 적어두려고 합니다.
카인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루틸!
이걸로 나중의 복습도 완벽해.
미틸
형님. 나중에 피가로 선생님께 함께 보여드리러 가주실래요?
저 이렇게 많이 배웠습니다, 라고. 열심히 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루틸
물론이지.
피가로 선생님께서 대단하네, 라고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미틸
네!
스노우
(말해주려나…… 피가로쨩.
미틸에게 어려운 마법을 가르치면, 이몸에게도 화내버릴지도?)
파우스트
(피가로님이라면 말씀해 주시겠지.
잘해냈을 때는 제대로 인정해주시는 분이시다.)
샤일록
자, 그러면 수업으로 돌아갈까요.
아까는 라스티카가 작은 새로 변신해 보였습니다.
다음으로 카인과 미틸도. 자신에게 친숙한 것으로 변화해 봅시다.
라스티카
미틸은 어떤 걸로 변하고 싶어?
우선은 생물보다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변화하는 편이 쉬울지도 몰라.
미틸
움직이지 않는 것…….
그러면 저 화단에 있는 빨간 꽃으로 해볼까.
라스티카
응, 근사하네.
그럼 저 꽃을 잘 관찰해 보는 거야.
몸 전체를 한 번에 바꾸는 것보다는, 손바닥이 꽃잎이 되는 걸 상상해 보렴.
샤일록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마음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면 주문을 외우세요.
미틸
습─ 하─…….
………….
<오르토닉・세알시스피르체>
와악! 손바닥에서 꽃이 나와 버렸다!
현자
(대단해, 마술 같아……!)
미틸
으으, 부끄러워……. 제대로 못 했어요.
라스티카
그렇지 않아. 대성공이야.
미틸
네……?
라스티카
손바닥에서 꽃이 나타났다는 것은, 제대로 손바닥에 의식이 향해 있었다는 증거야.
네 손이 커다란 꽃으로 물드는 날도 바로 눈앞에 있어.
그러니 지금은, 확실한 한 걸음을 내디딘 미틸 플로레스에게 축복을.
<아모레스트・비엣세>
라스티카의 손에 트럼펫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자 그는 경쾌한 팡파레를 불었다.
특대형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것처럼, 미틸의 뺨이 살짝 발그레해진다.
미틸
에헤헤…….
라스티카씨, 감사합니다.
샤일록
후후. 미틸의 뺨이 꽃으로 변해버린 것 같네요.
스노우
호오……. 저것이 칭찬으로 기른다는 것인가?
본인들이 저렇게 하면 말썽꾸러기 삼인방도 착한 아이들이 될 수 있을까?
파우스트
아니……. 저건 순수한 학생의 기질이 있어야 울림이 생기는 거겠지.
스노우
그렇겠지─.
라스티카
자, 다음은 카인이야.
너는 무엇으로 변화하고 싶어?
카인
글쎄. 나도 미틸과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까?
샤일록
하기 쉬운지 여부로 따지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당신과 미틸은 기질도 특기 분야도 다르니까요.
라스티카
그렇지. 카인은 어쩌면, 주변 사람으로 변화하는 편이 이미지를 잡기 쉬울지도 모르겠어.
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보고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능숙하다고 생각해.
그러니 오늘 입을 옷을 고르듯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주문을 외워보는 것은 어떨까?
카인
알겠어. 해보겠다.
………….
<그라디아스・프로세라>
현자
와, 아서다!
네로
대박, 똑같이 생겼네.
카인
오, 진짜?
루틸
어머. 말투는 카인씨네요.
카인
그렇군. 으음─…….
나는 아서 그랑…….
카인
우왓! 돌아와 버렸다.
미틸
카인씨 대단해요!
아서님으로 변화할 수 있다니!
카인
고마워, 미틸.
하지만 정말 순식간이었어. 분하다!
미틸
……!
카인
변화 마법을 사용하면서 본인의 말투도 신경 쓴다는 게, 그런 느낌이구나.
머리가 펑크 날 것 같았어.
라스티카
아아. 네가 도전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발견이구나.
그렇지만 너는, 사람을 보는 힘이 역시 탁월해.
아서님의, 햇빛에 반짝이는 은발의 윤기는 훌륭했어.
카인
진짜로? 사실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었거든. 전해져서 기쁘다.
……하지만 아직 과제가 많네.
좋아, 그저 향상뿐이다! 다시 한번 해봐도 될까?
미틸
저도요! 저도 다시 한번 하고 싶어요!
샤일록
네, 물론이죠.
몇 번이라도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파우스트
하지만 무리는 금물이다.
변화 마법은 특히나 집중력을 요한다. 마력 소모도 적지 않아.
스노우
슬슬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은 어떤가?
마법은 마음으로 사용하는 것.
마음이 조급해지면, 잘될 것도 잘되지 않는 법이라네.
네로
그러면 뭔가 밥이라도 가볍게 먹을까?
루틸
그 후에, 한번 천천히 노트를 둘러볼까요?
라스티카
혹은, 마음이 치유되는 음악은 어떠신가요?
제가 초대한 서프라이즈 게스트와 함께요.
현자
네? 서프라이즈 게스트요?
라스티카
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예감이 들었답니다.
오늘도 근사한 하루가 될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 하루에 어울리는 노래를, 그와 함께 전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께는 비밀로 하고 있었습니다.
카인
오오. 노래를 잘하는 서프라이즈 게스트인가.
미틸
라스티카씨의 친구라는 건, 유명한 가수분이라거나 그런 걸까요?
현자
그 게스트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이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라스티카
그게…….
잊어버렸습니다.
현자, 다른 마법사들
!?
라스티카
곤란하네요. 방금 전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러분, 혹시 모르시나요?
라스티카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며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림책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름다운 귀공자, 라스티카.
수백 년을 살아온 마법사로, 언제든 칭찬을 잘해주고, 변화 마법의 달인이고…….
그러면서도 조금 잘 잊어버리는, 우리의 엉뚱한 친구다.
현자
어? 뭐죠, 이 소리?
『휘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이끌려 모두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툭 하고 초록색의 무언가가 라스티카의 머리에 착지했다.
개구리
개굴.
미틸
으악!
라스티카씨, 머리, 머리!
카인
네 머리에 개구리가 올라탔어!
라스티카
안녕, 너. 조금 전에 봤었지.
네 쪽에서 나를 부르러 와준 거니? 상냥하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소개해 드릴게요.
그가 바로 서프라이즈 게스트입니다.
현자, 다른 마법사들
네!?
2화
샤일록
후후.
확실히 개구리도, 자연이 만들어낸 가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네로
그…… 런가?
파우스트
서쪽 마법사의 발상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군.
스노우
그건 그렇고, 왜 하늘에서 떨어진 겐가?
라스티카
최고의 타이밍이 될 때까지 하늘을 산책하며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보세요, 저 욕조 안에서요.
현자
오오, 하늘에 욕조가 떠 있어…….
아하하. 그러면 서프라이즈 대성공이네요.
여러모로 깜짝 놀랐어요.
라스티카
감사합니다, 현자님.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어서 그도 기뻐하고 있어요. 그렇지?
개구리
개굴.
미틸
…….
머리 위 개구리를 향해 미소 짓는 라스티카를 미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서, 또 다른 인영이 안뜰로 뛰어들어왔다.
쿡 로빈
현자님, 여러분~!
현자
쿡 로빈씨, 안녕하세요.
큭 로빈
의뢰서를 가져왔습니다. 확인해 주시겠어요?
파우스트
오늘은 손님이 많군.
급한 용무인가?
샤일록
어떤 의뢰일까요.
쿡 로빈
중앙 국가의 작은 마을에서 잇따라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뢰입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소리가 나고, 책상 위에 있었을 터인 접시가 몇 장이나 바닥에 깨져 있다거나…….
비가 내리는 밤, 집 밖에 둔 물건이 현관 근처 웅덩이에 내팽개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네로
들리는 느낌으로는, 흔히 있는 괴롭힘이잖아?
라스티카
혹은 장난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는 걸까?
쿡 로빈
그게, 장난이나 괴롭힘이라기에는 영향의 범위가 넓습니다.
다행히 현재 시점에서 사망자나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피해를 입은 집이 십여 채에 달합니다.
재앙의 습격을 계기로 날로 늘어가고만 있어서, 조사를 의뢰하고 싶다고 합니다.
루틸
그건, 빨리 도와드리고 싶네요.
그 마을은 중앙 국가 어디쯤에 있나요?
쿡 로빈
도시 바로 근처입니다.
『하늘색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카인
아아, 거기구나! 유명한 관광지잖아.
현자
관광지? 작은 마을이라고 하셨는데, 뭔가 있나요?
카인
마을 풍경이 말이지, 정말로 예쁘거든.
『하늘색 마을』이라는 이름대로 건물이 전부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다.
분명, 『맑은 날에 소중한 사람과 가면 평생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라는 소문도 있었던 것 같고…….
스노우
호오. 참으로 중앙 국가답게 사랑스런 소문이로구나.
이변이 해결된 뒤 본인도 화이트와 함께 가봐야겠군.
쿡 로빈
꼭 그래주세요.
저도 아내와 데이트를 했던 추억의 장소거든요.
샤일록
어머, 그래요?
쿡 로빈
네, 부끄럽지만요. 결혼 일의 일인데요.
그때는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는데, 풀이 죽어있는 제게 카나리아가…….
『당신이 웃어준다면 저에겐 맑은 날이랍니다』라고.
루틸, 미틸, 현자
멋져요~~~!
라스티카
아아, 두 사람의 찬란한 사랑에 지금 신곡이 떠올라──.
파우스트
기다려. 이야기가 탈선하고 있다.
쿡 로빈
헉, 죄송합니다!
음, 그러니까 이번 건은 저로서도 마음이 아파서요.
부디 여러분께, 조사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카인
물론이다! 빨리 가는 편이 좋겠지.
내일이나 모레라도 갈까?
미틸
저는 괜찮아요! 형님은요?
루틸
응, 갈 수 있어.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각각의 마법사가 루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카인
이 정도의 멤버가 모여 있다면 무서울 게 없다.
파우스트
출발이 빠르다면 오늘 중으로 조사 흐름을 정리하는 편이 좋겠지.
네로
그럼 담화실로라도 이동할까?
모두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마법관 안으로 향해간다.
그때 문득 스노우가 내 뒤에서 말을 걸었다.
스노우
현자여. 잠시 사쿠리피큠을 보여주지 않겠나.
현자
사쿠쨩을요? 네.
스노우
음, 음…….
오오, 역시나. 술식에 균열이 생겨 있구나.
잠시 맡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구먼.
현자
어어. 술식에 균열이……?
스노우
그 왜. 저번에 북쪽 국가 임무에서 흉포한 마수에게 습격당한 적이 있었잖은가?
커다란 뱀처럼 생겨서 독을 흩뿌리던 녀석 말이다.
현자
!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쿠쨩과, 그때 함께 계셨던 스노우님과 다른 마법사분들이 제 주위에 결계를 쳐주셨죠.
스노우
음. 그 마수가 품고 있던 사기는 사역마와 상성이 나쁜 모양이야.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
현자
사쿠쨩…….
평소와 같이 보였었는데, 몸이 안 좋았던 건가요……?
스노우
호호호.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쿠리피큠은 어디까지나 사역마. 목숨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뭐, 술식을 다시 걸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지.
하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이번 임무에는 본인이 동행하고, 사쿠리피큠은 화이트에게 맡기도록 하자꾸나.
현자
알겠습니다…….
사쿠쨩을 잘 부탁드립니다.
사쿠리피큠
…….
현자
사쿠쨩이 없는 임무라니, 왠지 오랜만인 것 같지만 나 열심히 하고 올 테니까.
너무 쓸쓸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줘!
꼬옥, 작은 몸에 얼굴을 파묻자 사쿠쨩은 그에 응하듯 내 뺨을 꼬리로 어루만져 주었다.
스노우
호호호, 흐뭇한 광경이구먼.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사쿠리피큠이 없을 때도 우리는 여러 차례 임무를 다녀왔지.
쓸쓸해지면 본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무나. 현자.
현자
아하하. 감사합니다, 스노우.
이틀 뒤. 모두와 함께 내려선 하늘색 마을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현자
와……!
카인
헤에. 이건 소중한 사람과 오고 싶어지는 것도 이해가 되네.
스노우
음. 이 표정을 눈앞에 두고 기뻐할 화이트쨩의 얼굴이 눈에 선하구먼.
빨리 이변을 해결하고, 오즈에게 하늘을 맑게 해달라고 해서, 다시 이곳을 방문해야지.
네로
뭔가 순간적으로, 엄청난 단어 들리지 않았어?
파우스트
아아. 하지만 언제나 있었던 일이다.
루틸
이번에 클로에가 만들어준 의상도 무척 화창하네요.
네로씨는 머리도 하늘색이라 『하늘의 나라에서 온 왕자님』 같은 느낌이 들어요.
네로
어? 아니, 아니. 그렇게 말하자면 기사씨겠지.
카인
나? 잘 어울리나?
미틸
엄청요! 산뜻한 카인씨에게 딱이에요.
카인
고마워. 너도 최고로 멋있다, 미틸.
……앗, 귀걸이가 떨어지려고 해. 고쳐줄게.
미틸
ㄴ, 네……!
카인이 등을 살짝 굽혀 미틸의 귀걸이를 다시 달아준다.
미틸의 자그마한 귀 옆에서 흔들리는 귀걸이를 확인하고, 그는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카인
좋아! 됐다.
미틸
감사합니다!
스노우
네로여. 인기 있는 남자는, 저렇게 칭찬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더욱 큰 칭찬을 얹어서 돌려주는 것이지.
네로
어……. 동쪽의 남자에게는 벅찬 일인데…….
파우스트
동감이다.
카인
이렇게 산뜻한 모습이라면 탐문하기도 쉬우니까 도움이 되겠지. 경계하기도 어려울 거고.
역시 클로에의 솜씨는 일류다.
라스티카
고마워. 영광이네.
스노우
네로여. 저것이 제자가 칭찬받았을 때 대응하는 방법이란다.
네로
왜 나한테? 나한테 제자는 없는데…….
샤일록
언젠가를 위한 어드바이스가 아닐까요?
네로
나는 애를 돌보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안 맞아.
그런 건 우리 선생님 쪽이…….
파우스트
아니. 나도 아직 배우는 입장이다.
네로
(흐음. 역시 이 사람, 겸손하네.)
샤일록
……그렇다고는 해도, 이 마을 풍경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상당한 배려가 필요하겠네요.
건물 자체는 오래되었으나 도장이 벗겨진 곳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라스티카
그러게. 바지런히 다 같이 다시 칠하고 있는 거겠지.
소중한 보석을 닦는 것처럼.
스노우
마법사의 기척은 없다. 즉, 인간들의 손만으로 이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일 터.
상당한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겠구나.
라스티카
혹은…….
???
꺄악!
전원
……!
갑자기 어디선가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현자
지금 그건……!?
미틸
여러분, 저쪽입니다!
미틸이 가리킨 것은 맞은편 거리다.
약간 비탈진 길 위에서 할머니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물고기 몇 마리가 땅바닥에 흩어져 있다.
미틸
<오르토……>
……윽…….
샤일록
맡겨 주세요.
<인비벨>
샤일록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물고기들이 일제히 허공을 날았다.
마치 하늘을 헤엄치듯, 할머니가 다시 품에 안은 바구니에 곱게 담긴다.
라스티카
레이디, 다치신 곳은 없나요?
샤일록
안심하세요. 물고기는 이제 전부, 당신의 손안에.
할머니
당신들…….
어쩜, 마법사인가보구나?
3화
루틸, 미틸
………….
파우스트, 스노우, 네로
………….
카인
아아, 그렇다. 나는 현자의 마법사인 카인. 이쪽은 현자인 아키라님.
모처럼 이렇게 만났으니, 괜찮다면 악수해주겠어?
할머니
아, 물론이지! 도와줘서 고맙네!
카인의 손을 꽉 잡는 할머니를 보며 루틸의 뒤에 있던 미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루틸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미틸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는다.
스노우
할머니. 둥실둥실~ 하고 물고기가 떠올라서 깜짝 놀라셨죠.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저희를 무서워하지 마세요.
할머니
그래. 무섭지 않단다. 당신들이 나를 도와줬는걸.
게다가 이 마을에는 딱 한 번, 아서 왕자님께서 시찰을 오신 적도 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셔서, 우리 시민들의 이야기도 마다 않고 들어주셨지.
『마법사나 왕족이라는 차이에 눈을 돌리지 말고, 힘들 때는 한 사람의 친구로서 의지해주길 바란다』라고 하셨네.
아서 왕자님도 분명 현자의 마법사 중 한 명이지? 당신들도 동료인가?
카인
아아, 맞아. 우리도 아서와 마찬가지로 당신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
라스티카
우선은 레이디, 저희의 신기한 힘으로 당신께 지팡이를 선물해도 괜찮을까요.
다시 당신이 넘어지려 할 때, 저 대신 당신을 지탱해 드리길 바라며.
할머니
어머, 고마워라. 미남씨.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넘어져서 물고기를 떨어뜨린 게 아니란다.
물고기를 쫓으려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을 뿐이야.
네로
응? 그럼 물고기는 왜 땅에 떨어진 거야?
할머니
그게 말이야, 나도 잘 모르겠어.
봐봐, 바로 앞의 가게. 나는 이곳에서 생선가게를 하고 있는데 말이지.
가게 앞에 둔 물고기가 아까 그 마법처럼, 갑자기 둥실~하고 떠올랐단다.
옆에서 길고양이까지 깜짝 놀랐다고.
정신 차리고 보니 물고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지.
파우스트
……이 마을에 마법사가 살고 있나?
할머니
아니. 들어본 적 없네.
루틸
그렇다면 장난을 좋아하는 마법사분의 소행은 아닌 것 같네요.
스노우
마법사의 기척이 느껴진다면 비탈길을 오르는 동안 누군가 눈치챘을 테지.
하물며 이만큼 오래 살아온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데 말이야.
그렇지만…….
샤일록
재앙의 기운은 느껴지네요.
스노우
음.
현자
어. 그렇다는 건 혹시, 물고기가 떨어진 것도?
미틸
이것도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변 중 하나라는 건가요?
할머니
뭐라고? 결국 내 가게까지 그 불길한 소문의 피해를 입다니…….
정말이지, 어찌 된 일인가. 시엘님이 들으시면 슬퍼하실 텐데…….
현자
(시엘……?)
저, 할머니. 시엘이란──.
딩, 딩, 하고 마을의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카인
이런. 이제 의뢰를 주신 영주님의 집으로 향할 시간이다.
레이디. 또 무언가 곤란한 일이 있다면 우리에게 언제든 말을 걸어다오.
당분간 이 동네를 드나들 것 같으니.
할머니
아아, 고맙네. 그렇게 할게.
미틸
………….
영주
여러분. 오늘은 하늘색 마을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사하시는 동안 머무르실 경우에는 방도 준비해 드릴 테니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카인
고마워, 도움이 된다.
저택에서 우리를 맞이해준 영주님은 겸손하고 성격이 좋아 보이는 분이었다.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고, 카인도 거기에 응한다.
현자
(굉장해. 방 안까지 하늘색으로 통일되어 있어.)
(역시 영주님의 저택이니까, 마을 분위기에 맞추고 있는 걸까?)
미틸
저, 이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루틸
저희도 방금 전에 이상한 일을 목격했거든요.
영주
뭐라고요?
라스티카
레이디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물고기가 스스로 하늘을 날았답니다.
샤일록
다행히 레이디께서는 다치지 않으셨지만, 재앙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파우스트
십중팔구, 이번 이변과 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무슨 법칙성이 있나?
일어나는 장소, 일시, 날씨, 뭐든 좋다.
영주
아니요, 그게 제각각이라서…….
낮에도 밤에도 관계없이, 부유한 집만 노리는 것도 아니고, 맑은 날도 비 오는 날도 상관없습니다.
네로
……무차별인가.
영주
어째서 이 마을에 이런 일들이…….
재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줄곧 조용하고 평화롭고 평온한 마을이었습니다.
분명 지금의 참상에, 그분도 마음 아파하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마을의 안녕을 되찾고, 천국에 계신 시엘님도 빨리 안심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현자
(어라……? 시엘씨라, 아까도 들었던 이름 같은데…….)
(게다가 천국이라는 건, 시엘씨는──.)
루틸
저…… 죄송합니다. 실은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도 시엘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만약 괜찮으시다면 그 시엘님이라는 분에 대해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이변 해결의 힌트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미틸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실은…… 저와 형님의 부모님도 천국에 계시거든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는 시간은 저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지만……. 쓸쓸한 기분이 될 때도 있으니까요.
저희는 영주님의 마음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남쪽의 형제는 어깨를 맞대고 눈앞의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영주
……정말 배려심이 깊으시군요, 감사합니다.
이런 마법사님들께서 세계를 구하는 역할을 맡고 계시다니, 저희 백성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루틸
어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미틸
에헤헤. 저는 아직 멀었지만요.
샤일록, 라스티카
…….
파우스트, 네로
…….
스노우, 카인
…….
현자
(후후, 루틸과 미틸이 칭찬을 받아서 다들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아.)
(나도 기쁘고…… 자랑스럽네.)
영주
그럼 부디 시엘님에 대해, 말씀드리게 해주세요.
그것을 위해 이 저택의 어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와주세요.
카인
이것은…….
라스티카
대단해. 마치 하늘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영주님이 연 문 너머도 하늘색 방이었다.
하지만 아까의 방과는 달리, 많은 봉제인형과 장난감 피아노가 장식되어 있다.
스노우
여기는, 아이 방인가?
영주
네. 여기는 시엘님의 방입니다.
그녀는…… 시엘은, 제가 만나 뵌 적 없는 누님입니다.
저희 부모님, 선대 영주 부인의 첫 아이로 태어났지만, 10살의 어린 나이에 별세하셨지요.
루틸, 미틸
…….
영주
하지만 9살 때까지는 무척 장난기가 많은 딸이었다고 합니다.
가정교사와의 공부 시간을 뛰쳐나와서는 마을 안으로 대탈주.
생선가게 주인의 방에서 쿠키를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파우스트
눈에 선하군. 개구쟁이 주인을 두면, 집사들은 꽤나 고생했겠지.
영주
네. 하지만 건강했을 적의 누나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 마을이 『하늘색 마을』이라고 불리는 것도, 관광지가 된 것도, 누나의 영향입니다.
누나가 병을 앓아 이전처럼 푸른 하늘 아래서 마을을 걷는 것이 어려워졌기에…….
아버지는 저택 안을 하늘색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무려, 당시 백성들의 발안으로, 마을 건물도 연이어 하늘색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언젠가 시엘님께서 건강해지셨을 때 이걸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라고.
카인
마을 전체가 준비한 특대 서프라이즈였던 셈이군.
다들 시엘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영주
네, 아주 많이.
누나는 그대로숨을 거두어, 마을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누나가 사랑했던 이 마을을 지키려고 하는 사이에, 점점 관광지로 유명해지고 마을은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로부터 50년. 당시의 누나를 아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지만, 누나는 우리에게 수호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은 50년간, 저택이나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당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파우스트
먼지 하나 없는 이 방이, 주인을 잃은 지 50년이 된 것이라니…….
샤일록
마치, 시엘이라는 소녀가 지금도 여전히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 같군요.
영주
여러분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사실 아주 가끔이지만, 마을 아이들에게 개방하거나 친척이 숙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방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저도 감개무량해서…….
이 마을의 평화를, 시엘이 하늘 저편에서 지켜봐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영주님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창문 너머의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 방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영주
죄송합니다, 말이 조금 많았지요.
여러분께 차를 다시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화
영주님에게 차를 받고 우리는 세 팀으로 나뉘었다.
루틸, 미틸, 카인, 네로는 마을의 탐문 조사로.
라스티카, 샤일록, 파우스트는 이 넓은 저택의 방을 하나씩 조사하기로.
그리고 나와 스노우는 영주님에게 이 마을에 대한 설명이나 그 밖에 뭔가 신경 쓰이는 점은 없는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스노우
……슬슬 다들 이 방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구먼.
영주여, 물러가도 좋다. 무언가 진전이 있다면 그대의 귀에 닿도록 하지.
영주
알겠습니다.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현자
영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역시 이 마을은 옛날부터 치안이 굉장히 좋기로 유명했나 봐요.
스노우
음. 듣자 하니 아서가 시찰을 온 것도 그 치안이 좋은 이유를 행정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더구나.
확실히, 마법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마을을 전부 같은 색으로 칠한다니, 모두가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재주지.
그렇다면 원망이나 증오로 인한 저주일 가능성은 희박한가…….
(깨지는 소리)
스노우
뭐지, 지금 소리는.
현자
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어요.
스노우
다른 방에는 샤일록 일행이 있다.
걱정은 없을 터이지만……. 나도 상황을 보고 오마.
오늘은 사쿠리피큠이 없으니 말이다.
현자
감사합니다, 스노우.
스노우
별것 아니다.
현자는 착하게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려무나.
작은 손바닥이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 눈동자에서, 아이를 보는 부모와 같은 따스함을 느끼며, 스노우의 손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
현자
(사쿠쨩이 없어서 그런가, 다들 평소보다 더 나를 지키려고 해주는 것 같아.)
(……아니, 그런 게 아닌가. 언제든 모두들, 나를 소중히 여겨주고 있어.)
(뭔가, 보답 같은 걸 할 수 없을까? 나는 인간이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뭔가 다른 형태로…….)
머릿속에서 마법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각자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일.
너무 좋아하는 그들에게 보답할 힌트는 없을까,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자──.
???
……나도.
나도 똑같아.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자
어?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현자
스노우, 저기……!
스노우를 부르려는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듯──.
내가 앉아 있는 소파에 놓여 있던 봉제인형이 툭 하고 쓰러져 손바닥에 닿았다.
순간 새하얀 빛이 뇌 안에서 터져나와 눈을 질끈 감는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 거기에는 하얗게 안개가 낀, 이 저택의 넓은 방이 펼쳐져 있었다.
현자
(어라? 이상하네…….)
(나 방금 전까지 시엘씨의 방에 있었잖아……?)
(……아!)
넓은 방에는 한 남성이 서류를 펼쳐놓은 채로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현자
(어딘가…… 지금의 영주님과 닮은 것 같아.)
(혹시 이 사람이…… 선대 영주님?)
남성
……시엘.
남성은 문득 고개를 들어, 딸깍 하고 열린 문쪽을 보았다.
그곳에서 봉제인형을 안은 한 소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발의 땋은 머리에 푸른 하늘의 눈동자.
그 눈동자는 어딘가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다.
현자
(이 아이가…… 시엘씨?)
(나, 시엘씨가 있었을 적의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시엘
안녕, 파파.
……아직 일하고 있어? 어제 제대로 잤어?
선대 영주
시엘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방에서 쉬고 있으렴. 몸에 해로울 거야. 파파는 괜찮으니까.
나중에 네가 좋아하는 하늘색 사탕을 가져다주마.
방에서 기다려주겠니?
시엘
……응. 고마워, 파파.
시엘씨는 봉제인형을 안은 채로 침대에 파고들었다.
가끔씩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봉제인형에게 말을 건다.
시엘
있지, 곰돌아. 나, 건강해질 수 있겠지?
건강해지면 하고 싶은 일이 잔뜩 있어.
시엘은 파파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침대에서 자고만 있는 게 아니라, 파파에게 힘이 되고 싶어.
응, 아빠뿐만이 아니야. 엄마나 마을 사람들에게도 잔뜩 보답하고 싶어.
왜냐면, 곰돌이도 어제 들었지? 어제 놀러 와 주었던 밀리쨩의 이야기.
나에게 살짝 알려준 비밀 이야기.
마을의 모두가…… 집을 하늘색으로 칠하고 있대. 이 방처럼.
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래.
시엘씨의 푸른 눈동자에 비구름이 몰려온다.
봉제인형에 꼬옥 얼굴을 파묻고, 빗물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엘
나만…….
나만, 받기만 하고 있어.
빨리 건강해지고 싶어……. 나도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모두에게 감사를 돌려주고 싶어.
울다 지쳤는지, 시엘님이 봉제인형을 안은 채로 눈꺼풀을 감는다.
봉제인형을 안은 손에서도 점차 힘이 빠지더니 툭, 시트 위에 놓인다.
마치 잠든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현자
(설마…….)
(혹시 시엘씨는 이대로……?)
(그건, 너무 슬프잖아. 어쩌면 좋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다시 한번, 새하얀 빛이 터진다.
다시 감겨버린 눈을 조심스레 뜨자 모두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몸이 어느샌가, 시엘씨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노우
오오, 현자가 눈을 떴다!
현자.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라스티카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미틸
스노우님께 들었습니다.
깨닫고 보니 소파에서 갑자기 주무시고 계셨다고.
샤일록
어딘가 편찮으신 건가요?
현자
……으…….
모두가 하고 있는 말은 알겠는데, 어쩐지 머리에 하얗게 안개가 낀 것 같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다.
내 안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기분이 드는데.
라스티카
………….
라스티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듯 얼굴을 가까이 댔다.
마치 아이를 재우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라스티카
말은, 수줍음을 많이 타니까요.
제대로 얼굴을 내밀어주지 않을 때도 있겠죠.
괜찮습니다. 당신의 페이스대로.
라스티카의 미소를 보고,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현자
……당신……. 이쪽으로 와.
라스티카
저, 말씀이신가요?
현자
그래.
내 몸이 저절로 일어나 라스티카를 향해 두 손을 내민다.
현자
(모, 몸이 멋대로 움직여……!)
잠시 라스티카도 눈을 크게 떴지만, 곧바로 눈을 감고 내게 몸을 맡겨주었다.
코롱의 향기를 느끼며, 다시 저절로 오른손이 움직인다.
현자
(나, 라스티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
(아까부터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어째서?)
초조한 감각은 들지만, 『무섭다』와는 다른,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다.
단지 내 손끝으로, 라스티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감촉만을, 확실히 느낀다.
루틸, 미틸
와아!?
네로
현자씨!?
파우스트
어째서, 라스티카를 껴안고 있는 거지?
카인
왜 그래, 아키라.
자다가 무슨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건가?
현자
(저도 모르겠어요……!)
라스티카를 계속 껴안고 있는 나를 향해 모두가 신기한 듯한 얼굴을 보인다.
모두에게 대답을 돌려주고 싶은데, 아직 머릿속이 흐릿해서 나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은, 또 스르륵 흘러넘쳐 나왔다.
현자
고마워……. 아까, 나를 다정하게 대해줘서…….
상냥한 당신에게 보답하고 싶어…….
당신의 소원을 알려줄래?
라스티카
저의 소원이요?
바로 옆의 라스티카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쳐든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라스티카가, 내 뺨에 손을 얹었다.
5화
라스티카
부디 다시 한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겠어요?
당신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현자
이렇게……?
내 오른손이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라스티카
네, 정말 기분 좋네요.
고마워요.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현자
……!
머리를 감싸고 있던 흰 안개가 순식간에 튕겨나가며 사라졌다.
팟, 라스티카에게서 손을 떼고, 드디어 몸이 말을 들어주는 걸 깨달았다.
현자
저기, 그게!?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왠지 몸이나 말이 조절이 잘 안 돼서요. 마치 제가 아닌 것 같아서…….
마법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썹을 찌푸린다.
다들 나와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것 같다.
순간, 바로 근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소나기일까. 방금 전까지 푸른 하늘을 비추던 유리창을, 굵은 빗줄기가 내리친다.
저택 하인들의 목소리
아이고, 큰일이다!
모두 분담해! 밖에 널어둔 시트를 걷어야 돼!
밖에서는 하인들의 분주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다시 흰 안개가 차오른다.
현자
나도, 가야만 해……!
미틸
현자님!?
카인
잠깐만 기다려!
빗방울이 온몸을 때리는 가운데 저택의 넓은 정원으로 달려나간다.
아직 걷어들이지 않은 시트 한 장을 정신없이 끌어안는다.
동시에 내 입에서 밝은 목소리가 나온다.
현자
와, 대단해! 달려도 가슴이 아프지 않아……!
나, 건강해졌어! 이걸로 모두에게──.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진흙탕에 발이 빠져 흰 시트와 함께 넘어지고 만다.
현자
아앗!
새하얀 시트가 진흙투성이가 된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빗줄기는 약해졌는데…….
내 눈에서, 대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현자
왜……. 어째서…….
어째서, 잘 안 되는 거야……?
나는 모두에게…….
미틸
현자님!
카인
아키라, 다친 곳은 없나?
현자
………….
진흙투성이가 된 시트를 손에 든 채 멍하니 주저앉은 내 주위로 모두가 모인다.
머리가 흐릿해져 모두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
카인의 두 가지 색의 눈동자에, 길을 잃은 듯한 얼굴을 한 내가 비친다.
그런 내 머리를, 카인이 큰 손으로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카인
당신, 아키라가 아니구나.
현자
나는…….
카인
화내는 게 아니야. 나는 단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다.
나는 카인, 마법사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
현자
응…….
카인
아, 그런데 그 전에…….
그 시트, 걷으려고 해준 거지?
고맙다. 당신의 이름은?
현자
……!
감사합니다, 카인. 음, 아키라입니다.
카인
! 돌아왔구나, 다행이다.
현자
여러분께도 아까부터 걱정만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샤일록
아니에요. 우선 비에 젖은 당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죠.
<인비벨>
햇살이 비치는 듯한 빛에 감싸여, 내 옷과 시트에 묻은 진흙이 말끔하게 깨끗해진다.
스노우
이게 무슨 일인고. 내가 붙어 있었는데 현자에게 이런 이변이 일어나다니.
사태는 일각을 다툰다.
현자여, 처음부터 가르쳐주렴.
내가 아주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현자
그게…… 그 방에서 갑자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순간 스노우를 부르려고 했는데 소파의 봉제인형에 손가락이 닿아서……. 꿈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시엘씨가 숨을 거둔 날의 꿈일 거예요.
파우스트
뭐라고?
스노우
소파에 있던 봉제인형…….
분명 시엘이 특별히 귀여워하던 것이라, 영주가 말했었지.
네로
그럼 그 봉제인형에 시엘의 강한 사념이 남아 있었다는 건가?
라스티카
현자님. 당신은 아까, 자신의 몸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씀하셨죠.
현자
네. ……혹시 조금 전까지 제 몸에 들어 있었던 건 10살의 시엘씨일까요?
샤일록
……현자님. 꿈에서 깨어나셨을 때의 상태를 들려주시겠어요?
거기에 무언가, 현자님께 일어난 이변의 힌트가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자
꿈에서 깨어났을 때……. 으음…….
시엘씨는, 건강해지고 싶다고 말했어요. 아주 괴로운 얼굴로.
건강해지면 하고 싶은 일이 잔뜩 있다고.
그대로 잠들듯이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 저,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뭔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어느샌가 눈이 떠졌어요.
루틸
현자님…….
카인
……그런 말을 떠올려낼 수 있는 당신이, 나는 좋다.
시엘도 분명 기뻤을 거야.
스노우
기뻤기 때문에 그 가여운 사념이,
현자에게로 옮겨가 버린 것일지도 모르지.
미틸
네? 무슨 말씀이세요?
파우스트
건강해지고 싶다고 강하게 바라는 시엘이 있었다.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강하게 바라는 현자가 있었다.
그러한 양자의 소원과 <거대한 재앙>의 기묘한 이변이 합쳐져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카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혹시, 이 마을에서 당장 떠나는 편이 좋은 건가?
루틸
그렇게 하면 현자님이 원래대로 돌아오실까요?
파우스트
아니, 그건 사례에 따라 다르다.
이런 빙의는 어떠한 계기로 다른 영혼과 인연이 맺어진 상태다.
그 영혼과 이 장소가 더욱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을 경우, 현자의 심신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네로
부주의하게 자리를 뜨면 현자씨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건가.
루틸
그럴 수가…….
스노우
모두 물러서 있거라.
……본인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현자
스노우?
정신을 차려보니 스노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를 띤 채,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스노우
본인이 현자의 영혼에서 시엘의 사념을 벗겨내마. 그리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터.
그러니 이 일은 결코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말도록.
특히나 화이트와 북쪽의 세 사람에게는.
자! <노스……>
파우스트, 네로, 카인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파우스트
그렇게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하면 현자에게 큰 부담이 갈 것이다!
네로
진정하라고.
실수해서 당황한 건 알겠지만……!
스노우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당황하지도 않았습니다─!
카인
스노우님. 당신답지 않다니까.
자, 숨을 들이마셔.
샤일록
아닙니다, 카인.
지금 그것은 아주, 몹시, 대단히 스노우님다운 소행이었습니다.
스노우
스읍─, 하아─………….
그치만 그치만 역시!
분하다구~~~.
현자를, 본인이 방에서 제대로 지키고 있었는데~~~.
미틸
스, 스노우님이……. 떼쓰는 어린아이 같이 굴고 있어…….
현자
괜찮아요, 알고 있습니다!
스오우가 계속 저를 신경 써 주고 있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부주의했던 게 잘못인 거예요! 스노우의 실수가 아닙니다!
스노우
현자쨩…… 고마워.
만약 화이트쨩에게 들켰을 때도 본인의 편이 되어줄 테야?
현자
그럼요!
미틸
저기, 북쪽의 마법사분들은 이럴 때 숨기고 싶어 하나요……?
굉장히 의외인데…….
네로
도련님. 이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체면밖에 없거든요.
불리한 일은 힘으로 억누르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面子
루틸
나쁜 점수를 받은 시험지를 서랍 깊숙이 숨겨 버리는 타입인가요?
네로
하하……. 어느 쪽이냐고 하면, 불태워서 시험을 없었던 걸로 만드는 느낌.
파우스트
믿기지가 않는군…….
6화
카인
스노우님의 분한 마음도, 기사의 신분으로서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지금 시점에서,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
현자님께 빙의하고 있는 것은, 시엘의 사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
다음 문제는, 시엘의 사념이 왜 현자님의 몸을 빌리려 하는지 모른다는 것.
그것을 알면 시엘의 사념을 정화해서 원래의 현자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지금은 우선 『시엘이 어째서 현자님의 몸을 빌리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루틸, 미틸, 현자
음…….
스노우, 파우스트, 네로
음…….
샤일록
…….
고개를 갸우뚱하는 우리 옆에서 샤일록은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라스티카
…….
붉은 눈동자가 응시하는 그 끝에는 눈을 감은 라스티카가 있다.
샤일록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경애하는 자신의 친구가 『지휘봉을 휘두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라스티카
………….
샤일록
쉿. 여러분, 귀를 기울여 보세요.
무대의 개막을 알리듯, 샤일록이 라스티카에게 시선을 향했다.
라스티카
시엘이 현자님의 몸을 빌린 것은…….
모두에게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현자, 마법사들
네……?
라스티카
제가 그 방에서 『고마워요』라고 전하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셨지요.
그리고 카인이 이 정원에서 『고마워』라고 전하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마을에서 물고기가 떠오른 것도, 현자님께서 급히 시트를 걷어오려 하신 것도.
모두,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루틸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다…….
시트는……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에 저택 사람들이 곤란해하고 있었죠.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요?
라스티카
응. 나는 그렇게 생각해.
미틸
하지만 마을 할머니는 전혀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오히려 물고기가 땅에 멋대로 흩어져서 곤란해지셨어요.
라스티카
그렇지. 하지만 레이디는 이렇게도 말하지 않았어?
『옆에서 길고양이까지 깜짝 놀랐다고.』
미틸
고양이랑 물고기……. 앗……!
어쩌면, 길고양이가 물고기를 노리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라스티카
역시 미틸이네.
나도 같은 의견이야.
네로
아하……? 그렇다면 의뢰에 적혀 있던 이변도, 시각을 바꿔서 볼 필요가 있다는 건가.
카인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밤, 집 밖에 둔 물건이 현관 근처 웅덩이에 내팽개쳐져 있었다』라는 것도…….
아까 시트를 걷어들이려 했던 것처럼, 실은 젖지 않을 곳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라스티카
예. 제 추리는 어떠신가요, 여러분.
시엘은 그저 저희에게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시나요?
현자
그,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소리를 높였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현자
죄송합니다. 바로 전까지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잘 몰랐는데요…….
지금 라스티카의 말로 여러 가지가 연결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파우스트
천천히 해도 괜찮다.
하나씩 들려줘.
현자
……네.
꿈속에서 시엘씨가 말했던 게 지금 또렷하게 기억났습니다.
『빨리 건강해지고 싶어…….』
『나도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모두에게 감사를 돌려주고 싶어.』라고.
시엘씨는 살아 있는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상냥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상냥함을 돌려줄 시간이 없었죠.
그래서…… 재앙의 힘을 빌려서라도 모두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
『고마워』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렇게 바라고 있는 건가…… 싶어요.
스노우
흠……. 빙의된 현자 본인이 그리 체감한다면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라스티카
예. 그리고 저는 한 가지, 무척 특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매우 안전한 방법으로, 시엘의 사념을 정화하는 방법이랍니다.
카인
정말인가!
알려다오, 라스티카.
라스티카
물론.
우선 우리 마법사들이 한 명씩…….
미틸
한 명씩…….
라스티카
현자님께, 어리광을 부리는 것입니다.
현자, 마법사들
네?
라스티카
현자님의 몸에 다시 시엘이 깃든다면, 그녀는 분명 아까처럼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쪽도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는 거예요. 그리고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합시다.
파우스트
응석을 부리는 것이, 정화의 수단이라고……?
샤일록
저는 찬성입니다. 가장 평화적인 방법인 것 같네요.
네로
어리광을 부리라고…….
상상도 못 하겠어…….
카인
그렇지만 할 수밖에 없다.
현자님을 되찾기 위해서다.
스노우
문제는 시엘이 언제 현자의 몸을 빌리려 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지.
이 마을에 며칠간 체류하며 현자의 곁을 교대로 지킬까?
현자
그, 그러면 여러분의 부담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요…….
………….
저기……. 저도 하나, 제안이라고 할까,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루틸
그럼요. 들려주세요.
현자
여러분의 마법으로, 제 몸을 의도적으로 시엘씨에게 빌려주는 게 가능할까요?
마법사들
……!
파우스트
그것은 가능하다만……. 만에 하나라도 위험이 수반될 가능성이 있다.
권할 수 없어.
현자
만에 하나……. 반대로 말하면 위험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거죠?
샤일록
유치하고 악의적인 욕망은 아닙니다. 보통이라면, 아마도.
하지만…….
미틸
재난의 영향을 받고 있다구요!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요!
네로
그래…….
그 뭐냐, 스노우도 두 번이나 실수할 수는 없잖아.
스노우
실수가 아니라네!
현자
실수라고 한다면 제 실수입니다.
사쿠쨩이 없다면 저 스스로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카인
아키라…….
현자
하지만, 질문드린 것은 책임을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제가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을 꾸었을 때, 시엘씨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제 솔직한 마음입니다.
게다가 마법사는 마음으로 마법을 쓰잖아요? 의도적으로 자신의 몸이나 마음을 빌려준다면 마법사 여러분보다 제가 부담이 적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틸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현자
파우스트가 말한 것처럼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있다고 해도, 여러분이 계셔 준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스노우, 아까처럼 시엘씨의 영혼을 벗겨내는 긴급 수단을 사용해 주세요.
스노우
현자…….
현자
그러니까, 시엘씨가 만족할 때까지 제 몸을 빌려주는 건 아무 문제없어요.
조금 전에도, 싫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제 몸을 빌려줌으로써 시엘씨의 사념도 정화할 수 있고 여러분도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게 된다면…….
제가 하게 해주시지 않을래요? 부탁드립니다.
라스티카
……현자님의 제안에, 이의가 있으신 분 계신가요?
카인
아니. 고마워, 아키라.
당신이 내린 결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용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현자
카인…… 감사합니다.
스노우
미안하구나, 현자쨩.
정말로 그대의 호의에 기대도 괜찮은 게야?
현자
네, 물론이죠! 여러분께는 항상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면, 사양 마시고 의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시엘씨와 마찬가지로……. 여러분께 평소의 은혜를 보답할 수 있다면, 그건 무척 기쁜 일이니까요!
몇 시간 뒤. 모두와 의논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내 몸을 시엘씨에게 빌려주게 되었다.
섬세한 마법에 능한 파우스트가 내게 마법을 걸어주기로 되어 있다.
파우스트
현자, 우선 숨을 깊게 들이쉬어.
그 뒤에 내가 셋을 세고, 주문을 외우겠다.
현자
알겠습니다.
습─, 하─…….
파우스트
3. 2. 1…….
<사틸크나트・무르클리드>
파우스트가 주문을 외우자마자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그것은 가슴 속의……, 작은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가 꽂힌 듯한 감각으로.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 나오라며, 망설이고 있는 아이를 손짓으로 부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것에 이끌리듯이, 내 머리가 멍하니 흐릿해져 간다.
현자
………….
파우스트
내 목소리가 들리나?
들린다면, 네 이름을 알려주었으면 해.
현자
시엘…….
7화
파우스트
좋아. 시엘. 우선 동네의 풍경을 잘 보렴.
네가 보고 싶어 했던 풍경이겠지.
현자
……!
느릿하게, 내 몸이 움직이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하늘색의 풍경을 눈동자에 담고, 두근두근 심장고동이 높아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자
예쁘다……. 정말, 너무……!
파우스트
아아, 그렇군.
시엘. 너는 이제부터 이 마을 안에서 여러 인물과 만나게 될 것이다.
네 앞에 나타나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래?
현자
내가, 모두의 소원을?
파우스트
그래.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거든.
부탁해도 될까?
현자
응! 물론이지!
파우스트
좋아. 그러면, 저쪽을 보렴.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있지.
저 사람은 루틸. 우선은 그의 소원부터 들어주면 좋겠다.
현자
알았어! 나 다녀올게!
파우스트
…………. 나도 담당 구역으로 가야지.
어리광을 부린다니…….
대충 하면 정화로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당한 난제로군…….
현자
루틸 오빠……!
저, 안녕하세요. 시엘입니다.
루틸
안녕, 시엘. 활기찬 인사 고마워.
오빠, 시엘과 이야기하는 게 두근거렸는데 방금 그 인사로 싹 날아가 버렸어!
오늘은 잘 부탁해. 오빠,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돼?
현자
그럼! 맡겨줘!
루틸
와아─. 만세!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자
(역시 루틸이다. 시엘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어.)
루틸
그럼 나는 말이야…….
시엘과 함께, 푸른 하늘 아래서 낮잠을 자고 싶어.
현자
낮잠? 그걸로 충분해?
루틸
물론이지. 나는 말야, 소중한 사람과 함께 뒹굴뒹굴 자는 시간을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이 마을 어딘가 낮잠 자기에 딱 좋은 장소를 알고 있니?
현자
응. 맡겨줘!
제멋대로 움직인 두 다리가 데려다준 곳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하늘색 마을 가운데서 이파리를 흔드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루틸
어머, 근사해라! 시엘은 아는 게 많구나.
현자
에헤헤.
루틸
그럼 바로…….
<오르토닉・세토마오제>
현자
와! 굉장해. 담요가 나왔어.
루틸
이 위에서, 같이 낮잠을 좀 자줄래?
현자
응! 오빠 먼저 누워.
루틸
그럼, 그 말에 감사히.
뒹굴.
와아, 하늘이 새파랗다! 바람도 기분이 좋아.
자, 시엘도 옆으로 와.
그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나도 루틸 옆에 엎드린다.
현자
루틸 오빠. 또 뭘 해주면 좋겠어?
루틸
어머. 아직도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그렇다면, 아주 특별한 비밀 소원인데…….
손을 잡고 있어 줄래?
현자
그럼! 꾸욱.
루틸
후후, 따뜻하네.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자다니, 오랜만이네……. 미틸도 많이 컸으니까.
현자
미틸?
루틸
응. 내가 너─무 좋아하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소중한 동생이야.
나는 형님이니까, 혼자 자세요, 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말이지, 가끔은 미틸과 같이 자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현자
그거, 말 안 하는 거야? 왜?
루틸
음……. 그럴 때는, 내가 우연히, 잠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날이 많아.
달님도 하늘에 떠 있고, 미틸은 이미 먼저 자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결국 잠들어 버리는 거야.
그래서 말을 꺼내지 못했어.
현자
그렇구나……. 하지만 분명, 미틸군은 말해주길 바랄 거라고 생각해.
루틸
응?
현자
루틸 오빠가 손을 잡자고 해서 나, 기뻤거든.
따뜻하다고 웃어줘서, 기뻤거든.
미틸군도 분명 똑같을 거야. 아닌가?
루틸
그런가……. 응, 그럴지도 모르겠네…….
오늘 저녁에 미틸에게 전해볼게. 형님과 같이 자지 않겠냐고.
후후. 고마워, 시엘.
예쁜 모양의 입술이 감사의 울림을 실은 순간.
흐릿했던 내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현자
네로 오빠─!
네로
……오, 왔다, 왔어.
루틸과의 낮잠을 마친 후, 나는 루틸의 말을 듣고 네로와 합류했다.
네로
으음─…….
겉모습은 현자씨지만, 시엘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지?
현자
그래. 오늘은 시엘이 뭐든 해줄게!
네로
하하. 그거 든든하구만.
그러니까……. 어리광을 부려라, 였지…….
현자
네로 오빠, 뭘 해주면 좋겠어?
네로
으음─…….
글쎄…….
현자
나, 도움이 못 되는 거야?
네로
아냐 아냐 아냐!!
그, 뭐냐─, 그거다, 그거!
저 가게의 샌드위치, 사다줄 수 있을까? 완전 먹고 싶어졌어!
현자
알았어, 맡겨줘!
네로
자, 돈은 이걸로 내.
현자
네─!
현자
……네로 오빠, 역시 같이 가줘.
네로
왜 그래? 심부름, 긴장해 버렸어?
현자
아니. 메뉴가 잔뜩 있어.
나, 네로 오빠가 뭘 먹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알려줄래?
네로
오, 그렇구나. 대단하네, 시엘은.
이상한 걸 가져오는 게 아니라 우두머리에게 보고할 수 있다는 건 제대로 된 녀석이란 거야.
현자
우두머리?
네로
하하, 내 이야기.
그럼 같이 갈까.
네로
하─, 맛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어 버렸네.
현자
응! 그리고 먹으면서 네로 오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어.
『맛있다. 이 소스, 뭘 쓴 거지?』 라면서.
네로
어이, 어이. 조금 전의 나를 흉내내는 거야?
현자
에헤헤, 맞아.
네로 오빠는 요리사니까 맛있는 샌드위치의 비결이 궁금한 거라고 알려 줬잖아.
네로
어, 그치.
현자
그러면, 그런 오빠에게 딱 맞는 약방, 나 알고 있어.
지금부터 같이 가지 않을래?
아빠가 시엘의 약을 사던 가게야. 손에 바르는 약도 잔뜩 있어.
네로
손에 바르는 약? 나, 어딘가 다친 것처럼 보였어……?
현자
아니. 오빠의 손은 정말 아름다워.
그러니까 약을 발라주면 좋겠어.
아빠는 거기서 말이야, 우리 집 요리사님 손에 바르는 약도 자주 샀거든.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손은 보석이니까, 찬물이나 화상의 통증으로부터 지켜주고 싶다고.
네로
……
현자
아빠, 자주 말했어. 매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건 우리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님 덕분이라고.
요리사님의 손은, 보석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손이래.
네로
하하. 반짝반짝 빛나는 손, 이라고…….
시엘, 너……. 좋은 집에서 자랐구나.
지금 그거, 솔직히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지만…….
……고마워. 내 손까지 소중하게 생각해 줘서.
그 가게, 데려다 줄래? 너랑 같이 보고 싶어.
푸른 하늘에 구름이 녹아들어 가듯이, 다시 조금, 내 머릿속의 안개가 걷힌다.
네로와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에, 나는 스노우와 합류했다.
스노우
다음은 본인의 차례다!
여기서는 명예 회복도 겸해서, 잔─뜩 어리광을 부려주마.
스노우
본인에게는, 스노우 오라버니라고 부르려무나.
현자
스노우 오라버니!!
스노우
음. 그러면 우선은 본인과 함께 하늘을 산책해 보도록 할까.
<노스콤니아>
두 사람을 태운 빗자루는 바람을 가르듯, 위로 위로 솟아오른다.
마을을 내다볼 수 있는 곳에서, 스노우의 빗자루는 구름처럼 그 자리에서 둥실둥실 떠다녔다.
현자
와아! 나, 하늘을 날고 있는 거구나!
그림책에서 본 마법사 같아. 대단해, 대단해!
(후후. 이 세계에 왔을 때의 나와 똑같은 반응을 하고 있어.)
스노우
호호호. 기뻐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로구나.
그래서, 그대를 이곳으로 데려온 데에는 이유가 있단다.
본인의 소원을 줄어줄 테야?
현자
응. 뭐든 말해!
스노우
그럼, 이 마을에서 추천하는 가게가 있다면 알려주게나.
내게는 사랑스러운 반쪽이 있단다. 그를 이번에 이곳에 데려오려고 생각하고 있지.
그때 스마트하고 쿨하게 안내할 수 있도록, 그대의 힘을 빌려주려무나.
현자
알았어!
그럼 우선 저 언덕 위에는 밀리쨩의 생선가게가 있어.
그 옆에는 고깔지붕의 과일가게가…… 어? 지붕 모양이 달라…….
………….
스노우
그 얼굴은, 제대로 알고 있는 모양이구먼.
시엘. 그대가 살아 있었을 적부터, 세월은 흘렀다.
완전히 똑같은 경치는 아닐 테지.
현자
……그렇구나…….
스노우
풀 죽을 필요는 없단다.
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변치 않는 것도 있다.
그대의 기억과 똑같은 가게는, 또 없는가?
부탁하마, 본인에게 알려주렴.
8화
현자
음…… 으음…….
앗, 저거, 저 둥근 지붕의 가게!
정말 좋아하는 하늘색 사탕 가게야! 으앗!
스노우
어이쿠, 위험해.
마을을 들여다보려 몸을 내밀다가 균형을 잃을 뻔한다.
떨어진다,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스노우가 내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스노우
개구쟁이 꼬마 아가씨 같으니라고.
현자
미, 미안해요……!
스노우
괜찮다, 괜찮단다. 그만큼 진심으로 본인에게 전하려고 해준 것일 테지.
고맙구나.
나보다 작은 몸의 그가, 내 어깨를 안은 채 속삭였다.
또 하나, 머릿속의 구름이 녹아내린다.
현자
다시 한번, 이 마을에 대해 제대로 전해줘도 돼?
얌전히 할게.
스노우
음, 부탁한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이대로 본인과 그대, 바싹 붙어 있도록 하자꾸나.
더 이상 그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
스노우와 하늘 산책을 마치고 스노우는 나를 영주님의 저택에 데려다주었다.
넓은 방으로 가라는 스노우의 말을 듣고 문을 열자, 그곳에서 맞이해 준 것은──.
샤일록
어서 오세요.
당신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자
당신이 샤일록 오빠?
샤일록
네, 그렇습니다.
샤일록
자. 시엘, 이리 오세요.
하늘을 산책했더니 몸이 조금 차가워졌겠죠.
샤일록은 스르륵 하고 스톨을 펼쳐 보였다.
현자
(이건 즉…….)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내 몸은 스륵 하고 그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샤일록이 스톨과 함께 내 몸을 감쌌다.
샤일록
역시 차갑군요.
현자
(……! 가까워!)
저기, 샤일록 오빠의 소원은?
부끄러워하는 내 마음과는 별개로, 순진무구한 아이의 대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샤일록
이미 이루어졌답니다.
현자
어?
샤일록
사실 저도 방금 아름다운 마을 거리를 산책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 차가워져서, 당신의 온기를 받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말하며 샤일록이 내 뺨에 그의 뺨을 가져다 댔다.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이 보이고 있는데도, 밤공기를 가둔 듯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파우스트
………….
샤일록
어머, 파우스트.
파우스트
교대 시간에 맞춰 왔는데……. 샤일록.
너의 그것은 응석을 부린다기보다는, 안쪽의 현자를 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샤일록
어머? 그럴 리가 없죠. 제 몸이 차가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자, 당신도 그 몸으로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직 제 왼팔이 비어 있답니다.
파우스트
…….
정말이군, 차갑다. 의심해서 미안했다.
따뜻하게 하는 데 나도 협조할까.
샤일록
이런, 이런…….
어리광을 잘 받아주는 꼬마가 여기에도 또 한 명.
*坊や
현자
저기. 이 사람이 파우스트씨?
샤일록
그래요. 파우스트 오빠랍니다.
아쉽지만……. 당신의 온기는 이 몸으로 확실히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밤하늘 향기에 감싸여 있던 머릿속에서 흰 구름이 다시 조금 희미해져 간다.
샤일록은 나에게 스톨을 건넨 채 파우스트에게 윙크를 한다.
샤일록
파우스트, 이 뒤는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시엘과 현자님께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 주세요.
미소를 입술에 머금고, 그는 방에서 떠나갔다.
파우스트
……마침내 내 차례인가.
…….
현자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게 전해져 온다…….)
파우스트 오빠, 화났어……?
파우스트
화나지 않았어.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시엘. 나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서툴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래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 조금 시간을 줄 수 있을까.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파우스트를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직 희미하게 안개가 껴 있는 내 머릿속에 어떤 인물의 모습이 흔들린다.
그것은 꿈속에서 보았던…… 선대 영주님이 서류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 광경을 떠올리고 있자, 내 오른손이 움직여──.
현자
오구오구, 잘했어…….
파우스트
……!
왜 그래, 갑자기.
현자
파우스트 오빠는 노력가구나.
우리 아빠랑 똑같아.
파우스트
……선대 영주와?
현자
응. 일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항상 잔뜩 생각해 줬어.
나, 아빠를 계속 오구오구 해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당신에게도, 오구오구.
착하다, 잘했어.
파우스트
…….
파우스트는 아무 말도 없이 살며시 눈을 감고,
내가, 시엘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었다.
내 손끝에서, 그의 머리카락의 부드러움이 전해져 온다.
파우스트
…….
그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은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모르게 느껴졌다. 끝을 고하듯 파우스트가 살짝 눈을 뜬다.
파우스트
……고맙다.
네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겠어.
부성을 느끼게 하는 미소로 그는 감사를 전했다.
그 울림이 다시금, 나에게서 안개를 지워간다.
경련하듯, 나의 의지로,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이 움직였다.
파우스트
……!
현자
(어쩌면…… 시엘씨의 사념이, 상당히 옅어져 가고 있는 건가?)
파우스트
시엘. 나는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아직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미틸
안녕하세요, 시엘씨.
저는 미틸입니다.
하늘색 아이 방 안에서 미틸이 이쪽을 향해 악수를 청한다.
아직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 양손이, 그의 손을 꽉 맞잡는다.
현자
안녕, 미틸 오빠.
미틸
에헤헤……. 현자님의 목소리로 미틸 오빠라고 불리는 거, 쑥스럽네요.
그러니까…… 오늘은 정말로, 제가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거죠?
다른 마법사들도 제대로 어리광 부렸나요?
현자
응. 모두 고맙다고 말해줬어.
미틸
그, 그렇군요……! 다들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전혀 상상도 안 되는데…….
저 혼자만 부끄러워하고 있으면 안 되겠죠.
좋아.
저, 이 소파에 같이 앉아도 될까요?
현자
응. 당연하지!
안절부절 못하는 미틸의 권유로, 우리는 둘이서 나란히 붙어 앉는다.
미틸
시엘씨가 들어주셨으면 하는 소원, 저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저기…… 저의 반성 연습에, 함께해 주시지 않을래요?
현자
반성 연습?
미틸
네. 저, 미래에는 모두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 대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시엘씨와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아직 많이 있거든요…….
오늘도 실패해 버렸습니다.
현자
(실패? 미틸…… 무슨 일이지?)
내 걱정과 연결된 건지, 시엘씨 또한 그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내 오른손이 미틸의 왼손과 겹쳐진다.
미틸
……!
저…… 오늘 할머니를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주문을 외웠지만, 끝까지 말하지 못해서…….
현자
(그것은, 그때의……?)
미틸
<오르토……>
………….
미틸
처음 오는 장소에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게, 갑자기 무서워져서.
마법사다! 라고, 듣게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미틸이 이전에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평소에는 가지 않던 큰 마을에서 마법을 사용해서, 주변 사람들이 겁을 먹은 것.
그것이 너무 충격적이라,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적이 있다는 것.
현자
(내가 항상 보는 미틸은, 노력가에다 긍정적이고 의지가 되는 남자아이지만…….)
(미틸이 말했던 괴로운 추억이, 없어질 리가 없잖아.)
어느새 포개진 손 아래에서 주먹을 쥐고 있는 그의 힘을 풀고 싶어서, 그의 마음도 풀고 싶어서…….
포개진 손을 좌우로 움직이고 싶다고 염원하자, 느리지만 확실히, 나의 의지로 그것은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미틸의 주먹을 어루만진다.
미틸
혹시, 지금 이거, 현자님……?
9화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지만, 미틸의 눈동자를 계속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틸
제 주위에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어째서 나만 잘 못하는 걸까? 하고.
실패투성이라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일이 잔뜩 있어요.
현자
응…….
미틸
하지만 최근…… 깨달았습니다.
그런 멋진 형들도 실패하거나 못하는 게 있다는 걸요.
그럴 때 형들은 『분하다!』라거나. 『잊어버렸습니다』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시더라고요.
저, 그걸 보고 왠지…….
멋있다, 라고.
신기하죠. 실패한 건 마찬가지인데…….
잘하지 못해도, 『못했다! 분하다!』라고,
웃으면서 『다시 한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저도 조금 더,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자
미틸 오빠…….
오빠는 이미 너무 멋있어.
미틸
네?
현자
시엘, 그런 건 생각도 못 해봤어.
모두를 돕고 싶은데 잘하지 못해서, 부끄럽고, 그것뿐이었어…….
미틸
시엘씨…….
현자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 좀 더 미틸 오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미틸
어어, 으음─…….
그, 그럼…….
사실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던 부탁이 있는데요…….
제 마음을 알아준 시엘씨라면 웃거나 그러지, 않을 거죠……?
현자
응. 절대로 웃거나 그러지 않을게.
미틸
그, 그러면…….
무릎을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현자
? 그래.
미틸은 수줍어하더니, 내 무릎 위에 슬쩍 누웠다.
미틸
오늘은 뭐든 부탁해도 된다고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이게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지금보다 좀 더 좀 더, 마법을 잘 쓰지 못해서 풀 죽어 있을 때…….
형님이 이렇게 해주셨거든요.
이제 어린애 같아서 어리광 같은 걸 부릴 수는 없지만요.
현자
왜? 루틸 오빠는, 미틸 오빠가 어리광을 부렸으면 좋겠다고 했어.
미틸
어. 무슨 말씀이신가요?
현자
미틸이랑 손잡고 잠들고 싶을 때가 있대.
오늘 밤에 그렇게 전해볼 거라고.
미틸
……형님이, 저랑……?
……뭐, 뭐야아. 역시 형님도 의외로 아직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니까.
후후, 기대되네.
……감사합니다. 시엘씨. 현자님.
저도 오늘 밤 형님에게 조금만 어리광을 부려 볼게요.
걷혀가는 안개를 느끼며, 남은 흰색은, 이제 아주 조금.
카인
어때, 시엘.
모두의 소원, 많이 들어줬어?
미틸과 교대해서 들어온 카인이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현자
응! 다들 엄청 기뻐해 줬어.
카인
그런가. 역시 시엘과 현자님이군.
그럼 나도 바로…… 라고 말하고 싶다만.
당신을, 쓰다듬어도 될까?
현자
어, 나를?
왜? 나는 카인 오빠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데.
카인
그 마음은 물론 기쁘다.
그러니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현자
음─…… 그런 건가……?
카인
하하. 그 얼굴, 납득하지 못했군.
나는 말이지, 시엘.
그의 뒤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면서, 태양에 지지 않는 미소를 정면으로 받는다.
카인
어리광을 부리기보다는,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는 남자이고 싶다.
아직 전혀 못하고 있지만 말이지.
뭐 그 부분은,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걸로.
수많은 목숨을, 긍지를, 지켜 온 커다란 손바닥을 가지고 있는데도.
높은 곳을 목표로 하는 그의 뜻은, 이 하늘보다 훨씬 높다.
현자
그러면 카인 오빠의 어리광은 누가 받아줘?
카인
누가? 모두가.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왔다.
특히…… 부모님께는 말이다.
어리광을 잔뜩 부렸지, 그렇다기보다, 폐를 끼쳐왔다.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계속, 두 분께는 어린아이로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을 겸비한 듯한, 두 가지 색의 눈동자가, 창문 너머로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그의 고향이 비치고 있는 걸까.
현자
카인 오빠도…… 정말 좋아하는구나. 파파랑 마마를.
카인
그래.
사랑하고, 존경한다.
카인의 어머니
카인, 제발 부탁이야.
왕도에 가는 건 그만둬.
영광의 거리의 기사로 충분하지 않니. 다들 예뻐해주시고, 영주님도 잘해주시는데.
카인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가려는 거 아니겠어.
모두의 덕택에, 어렵게 잡은 찬스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올게. 이 날을 계속해서 꿈꿔왔다고!
괜찮아! 자랑스러운 아들이잖아?
카인의 어머니
너는 세상을 몰라…….
어찌 됐든, 아직 너무 어리다고.
카인
걱정 말라니까.
카인의 어머니
왕도의 기사라는 거, 분명히 소문만큼 대단한 게 아닐 거야.
이 거리에 있는 편이…….
카인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계속, 내 꿈을 응원해 줬잖아?
늘 그랬듯이 웃으면서 배웅해 줘.
걱정하지 말래도, 괜찮다니까.
카인의 어머니
………….
카인
왕도에서 출세해서, 뭔가 대단한……, 음, 잘 모르겠지만 고급품을 선물할게!
기대하고 있어!
카인의 어머니
……마음대로 하렴.
카인
………….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카인
어머니도 아머지도, 하려고 했다면 힘으로라도 막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지.
마지막에는 나의 의사를 존중해서, 가게 해주셨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다.
그렇기에, 아카리를 만날 수 있었다.
시엘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자
카인 오빠…….
카인
시엘…….
실은 너를 믿기에, 내게는 또 한 가지, 부탁이 있다.
현자
뭔데?
카인
시엘, 너는 좋은 녀석이야. 그것은 오늘 하루만으로도 정말 잘 알 수 있었다.
하늘로 떠나간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부탁하고 싶다.
이제 아키라의 몸을 아키라에게 돌려주지 않겠어?
이 사람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다.
현자
(카인…….)
설마 카인이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내 가슴속이 서서히 뜨거워진다.
현자
……응, 그렇지. 카인 오빠.
나, 아키라씨의 몸을 돌려줄게.
카인
……! 정말인가.
현자
정말이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 라스티카 오빠를 만나고 싶어.
카인
라스티카를?
현자
라스티카 오빠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카인
알겠다. 지금 불러오지.
고맙다, 시엘. 내 소원을 들어주려 해주어서.
──안개는 이제, 거의 사라져 있었다.
시엘씨와의 작별은 바로 코앞이다.
현자
(……왠지 오늘은 정말 신기한 날이네.)
카인이 자리를 비우고 조용해진 방을 둘러보면서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회상한다.
현자
(처음에는 솔직히, 어떻게 되려나 생각했던 것도 있었는데…….)
(모두에게 여러 형태로 어리광을 받아주고, 아주 조금, 보답할 수 있었던 거라면 좋겠다.)
네, 들어오세요.
라스티카
실례하겠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현자님. 시엘.
문을 살짝 열고, 라스티카가 들어왔다.
라스티카가 미소를 짓더니 흐르듯 나를 끌어안는다.
그 포옹은 자애와 상냥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현자
(어, 놀랄 틈도 없이 끌어안겨 버렸다…….)
뒤늦게 찾아온 놀라움과 함꼐, 후훗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라스티카의 자유로운 행동이 사랑스러워서.
그러자, 그에게 껴안겨 있는 채인 내 입에서도, 『후훗』하고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이미 내가 내 몸의 자아를 되찾고 있다는 증거였다.
라스티카
어머. 지금 미소는 혹시, 현자님?
현자
으…… 음…….
……!
(조금이지만,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
라스티카
……그래, 시엘.
네 손을 빌린 모두에게, 많은 감사를 받은 거구나.
현자
……응. 라스티카 오빠 덕분이야.
나, 오늘 계속, 라스티카 오빠에게 전하고 싶었던 게 있었어.
라스티카
나에게?
현자
그래.
라스티카 오빠, 있지…….
내 머릿속의 안개가 갑자기, 한층 짙어졌다.
마치 소녀가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10화
현자
고마워. 나를 알아줘서. 내가 『모두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걸 알아줘서.
나, 사실은 무서웠어.
모두를 돕고 싶었는데, 힘이 되고 싶었는데.
계속…… 잘하지 못했거든.
모두가 웃어 줬으면 했는데. 다들 점점 무서운 얼굴이 돼서.
그래서 오늘은…… 건강한 몸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모두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어서…….
내 가장 큰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야.
너무, 너무, 너무, 기뻤어. 정말 고마워.
라스티카
천만에. 시엘.
하지만 나야말로,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단다.
현자
응……? 어째서?
나, 라스티카 오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라스티카
그렇지 않아.
시엘, 너는 알고 있니?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바람을 흔들어, 이윽고 큰 폭풍을 일으킨다는 것을.
현자
(그 말은…….)
라스티카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단다.
어떤 사소한 음색도, 악곡에 영향을 미치니까.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바람을 흔들어, 이윽고 큰 폭풍을 일으키듯이.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이윽고 큰 폭풍을 일으킨다…….
라스티카의 말에, 나는 마법사들에게 들었던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득히 먼 옛날, 누군가가 일으킨 행동이 파도처럼 퍼져나가…… 누군가의 인생에 닿는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간다.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
누군가가 변하지 않은 것도. 누군가가 변한 것도.
라스티카
너는 잘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고 말했지.
계속 너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고.
현자
응…….
라스티카
분명 너는, 너의 아버지를 직접 도와드린 적은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새벽녘의 방에서, 문가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사랑하는 딸의 모습이, 그에게 얼마나 힘을 주었을까.
마을을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있었을 무렵의 너의 웃는 얼굴이, 그 추억이, 모두에게 얼마나 힘을 주었을까.
너는 너 자체로, 사랑받고 있었어.
그래서 이 방이, 마을이, 하늘색으로 물든 것이지.
그리고 하늘색 마을은, 50년이라는 세월, 온화한 시간을 보내며, 아서 왕자가 시찰을 다녀갈 정도가 되었단다.
아서 왕자가 시찰을 다녀왔기에 이 마을은, 우리 마법사들도 기꺼이 맞이해줄 수 있었지.
그렇기에 모두가 지혜를 모아 너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한 음 한 음이 겹쳐지듯이, 지금 이 순간의 멜로디는 다름아닌 너와 함께 만들어 낸 것이란다.
그러니, 나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게 해줘.
네가 너로 있어준 것에.
고마워, 시엘.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눈가에는 촉촉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눈물은 시엘씨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말해 왔던가.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말한 적이 있었나.
내가 나인 것에 고맙다고.
내가 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저 나이기에…….
소중한 친구들과 만나게 된 『지금』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친구에게 『언제나 고마워』라는 말을 하듯이, 스스로에게 같은 말을 전한 적이 있었을까.
눈꺼풀에서 흘러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이, 계속 껴안아 주고 있는 라스티카의 어깨를 적셔 간다.
동시에, 방금 전까지 짙어져 있던 흰색이 점점 옅어져 간다.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것처럼.
이제 그 흰색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이 마음이 느낀다.
현자
……고마워……
라스티카씨.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 왔을까.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에게 구원받아 왔을까.
눈앞의, 라스티카 펠치라는 귀공자의 아름다운 마음에.
그에게 받은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진 사람.
만약 그 사람들이 한 송이씩 꽃을 가져온다면……. 정말로 아름다운, 꽃밭이 되겠지.
아니, 세상이 꽃으로 뒤덮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 또한, 그인 채로 계속 존재하는 그 너머에서…….
그런 세상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라스티카
………….
라스티카는 손끝으로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온몸이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무심코 내 손을 바라본다.
현자
혹시, 시엘씨의 사념이 사라졌나……?
어……! 목소리가……!
저, 말할 수 있어요! 라스티카!
라스티카
정말이네요.
어서 오세요, 현자님.
마치 입맞춤을 나누기 전의 연인 같은 거리에서 라스티카는 미소를 지었다.
현자
(헉! 껴안겨 있었던 걸 잊고 있었다!)
라스티카
어머? 얼굴이 붉으시네요.
아직 창밖은 밝지만. 당신의 얼굴은 벌써 석양의 빛을 비추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현자
어어…….
이 포옹은 언제 그만해 주실 건가요, 라고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그건 참 어리석은 짓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마음이, 몸이, 이 따스함이 좋다고 말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아직 어딘가 들뜬 기분으로, 한동안 라스티카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野暮というか、何というか。
현자
오늘은 왠지 정말 긴 하루였네요…….
다시 한번, 여러분, 의뢰 해결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석양이 시작된 마을을 걸으며 나는 마법사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카인
무슨 소리야, 현자님.
이번에 가장 큰 공로자는 당신이잖아.
미틸
맞아요! 몸이나 마음에 부담이 가지는 않았나요?
현자
전혀 문제없습니다!
시엘씨도…… 만족하신 것 같아요. 이제 분명 이변은 일어나지 않겠죠.
스노우
아아. 틀림없겠지.
만약을 위해 영주에게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전해두었다마는.
샤일록
저희가 각자 아주 특별한 『고마워』를 전했으니까요.
그 순수한 마음을 가진 소녀라면 분명 받아들여 주었을 것입니다.
파우스트
……그렇겠지.
네로
뭔가, 마물과 대결을 한다거나 의식을 치른다거나 한 게 아닌데도, 엄청나게 체력을 쓴 기분이 들어.
그, 좋은 의미로 말야.
그런 기분 안 들어? 선생.
파우스트
……든다.
루틸
파우스트씨. 왠지 아까부터 말씀이 적지 않으신가요?
샤일록
후후. 파우스트가 그만큼 열심히 임했다는 것이겠지요.
스노우
모두의 덕도 있고, 현자가 이리 무사히 돌아온 것이 무엇보다 기쁘구먼.
하지만 이번 건에서는 다시 한번 사쿠리피큠의 중요성을 느꼈다네.
아니, 반대로 이것은 사쿠리피큠이 있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결과인 걸까?
혹시 없는 편이 나으려나?
현자
네!? 그렇지 않습니다.
사쿠쨩이 곁에 있어주는 것은 저에게도 기쁜 일이에요!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스노우
그런가? 그럼 마법사 저택에 돌아가면 본인도 화이트쨩에게 합류해서 얼른 보강해 버릴까.
화기애애하게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문득 내 의지로 발걸음을 멈춘다.
둘러본 하늘색 마을은 석양에 물들어 있고…….
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밝게 비치고 있다.
현자
(마을을 덮치는 수많은 이변을 설마 『어리광』으로 해결해 버리다니.)
라스티카
현자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해질녘에는 길을 잃기 쉬우니까요.
자, 손을 잡도록 해요.
우리를 이끌었던 지휘자가, 나를 향해 손을 내민다.
현자
네! 감사합니다!
신기하게도 오늘은 수줍어하지 않고 그 손을 맞잡았다.
그것은 분명, 다시 한번 그를, 그들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늘색 마을──.
『맑은 날에 소중한 사람과 가면 평생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라고 일컬어지는 이 마을.
부디 그들과 앞으로도, 나는 나인 채로, 계속해서, 친구로 지낼 수 있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우리는 빗자루에 걸터앉아 하늘의 귀갓길로 나아갔다.